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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과 저승을 잇는 플랫폼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일찍 당도한 4월의 유령은 불안한 눈으로 이승을 볼 수 있는 투명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플랫폼 관리자는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발급된 사망예정표를 살펴보려다 포기하고 4월이 보는 곳에 함께 시선을 두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저 지평선에서 파도처럼 밀려들 무수한 12월의 유령들. 크고 넓은 이 플랫폼이 비좁게 느껴지겠지. 정확한 사망자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예정된 운명 앞에서 관리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존재들이 도착할 것이다. 낯설게 변한 자기 몸을 만지다가 죽었다는 삼성화재우리캐피탈 것을 깨닫고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윽고 들려올 것이다. 이승과 저승을 동시에 진동시킬 죽은 자의 울음소리와 남은 자들의 비명. 파도치는 거대한 눈물바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고,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던 비극. 관리자는 입술을 꾹 다물고 4월의 곁에 섰다.
“이 먼 길을 어쩐 일로 오셨나요?”
“걱정돼서… 가만히 신축빌라분양 있을 수가 있어야지. 방법이 없을까?”
방법? 관리자는 그동안 목격한 여러 일들을 생각해봤다.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다시 반복되는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참사에 대하여. 무책임한 폭력에 희생당해 힘없이 꺾인 무수한 생들에 관하여. 별수 없겠지. 운명이란 시위를 벗어난 화살 같은 것이니까. 과녁을 뚫기 전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펀드닥터“글쎄요. 희생자가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다 죽을 거야.”
관리자와 4월은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5월의 유령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이승의 겨울밤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후대가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말은 개소리야. 봐. 바뀐 게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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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고개를 돌려 플랫폼 너머의 지평선을 바라보다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기억 속에 펼쳐진 푸른 바다와 희미한 수평선. 하얀 파도와 반짝이는 윤슬로 아름다운 섬. 유채꽃이 산과 들을 뒤덮던 따뜻한 봄날. 큰바람과 파도 소리에 섞여 울려 퍼진 총소리. 까만 돌멩이에 앉아 있다 이 원카드 유도 모르게 죽어간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 하지 않은 일을 했다 했고, 하지 않은 생각을 마음에 품었다 했다. 지금도 나는 이유를 모른다. 함께 죽었던 4월의 유령들은 모두 의문을 품고 있다. 왜 자신이 죽어야 했는지, 나를 죽인 자들은 왜 그토록 화를 냈는지, 모른다. 4월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5월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끝이야. 전화 한 통화. 명령 한 번으로.”
명령이 떨어지면 기계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 복종을 합리화한다. 스스로 모르기를 선택한 뒤 ‘어쩔 수 없었다.’ 변명하는 이들. 생각하기를 멈춤으로 양심의 입을 틀어막는다. 총소리 한 발로 이루어지는 살육. 정의로운 전쟁도, 사랑으로 시작된 다툼도, 똑같다. 신념이 달라서가 아니다. 공포와 불안이 같은 편끼리 총구를 겨누게 한다. 내 사람을 지키는 뜨거운 마음으로 들불처럼 타오르는 슬픈 전쟁. 가만히 있어도 죽고 저항해도 죽는다. 사랑 때문에 죽고 사랑 때문에 죽인다. 증오 때문에 죽고 증오 때문에 죽인다. 끔찍한 것은, 그래서 견딜 수 없는 것은, 명령을 내린 자는 총성과 비명이 들리지 않는 안온한 안락의자에 앉아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며 미치광이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 5월은 오래전 그날이 떠올라 새삼스럽게 치가 떨렸다. 나는 대단치 않은 청년이었다. 나 외에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던 개인주의자였다. 부당한 일에 눈감고 억울한 일도 모른 척했던 비겁쟁이 졸보였다. 그랬던 내가 군인들 앞에 서서 주먹을 움켜쥐고 외치고 또 외쳤던 건 아무 죄 없는 친구의 머리에서 흐르던 피를 봤기 때문이다. 나는 묻고 싶었다. 따지고 싶었다. 왜 내 친구를 다치게 했냐고. 노래를 좋아하고 아이를 사랑했던 그가 무슨 죄가 있냐고. 그러나 누구도 답해주지 않았다. 말하는 입을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릴 뿐. 5월은 알았다. 누군가 방아쇠를 당길 것이고 그 소리가 모두를 변하게 할 거라는 것을. 내 곁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맞은편 사람을 해하게 될 거라는 것을. 어떤 명분도, 그 어떤 이유도 없이 폐허가 된 삶의 현장에 피어오르는 한 줄기의 연기를 부모 잃은 아이들이 보게 될 거라는 것을.
화살은 시위를 벗어났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시작된 것이다. 명령은 내려졌고 전쟁의 시스템은 가동됐다. 하지만 이상했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 헬기가 떴고 장갑차가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실탄을 장전한 군인들의 전진을 시민들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고요했다. 총소리는 끝내 울리지 않았고 울음소리와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저 지평선을 가득 메울 망자들을 기다렸던 유령들과 관리자는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4월과 5월은 이승의 상황을 보고 또 봤다. 비극의 조건은 충족됐고 폭력의 방아쇠도 당겨졌는데 어째서인지 세상은 잠잠했다. 점점 차가워지는 12월의 어둠이 떠오르는 태양으로 하얗게 부서질 때까지 어떤 죽음도 발생하지 않았다. 예정된 죽음이 기록된 길고 긴 종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관리자는 투명거울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어 이승의 밤 여기저기를 유심히 살폈다. 불가능한 결과였다.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운명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될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피투성이로 기억될, 영원한 고통으로 각인될, 12월의 밤이 이렇게 그냥 지나간 것이 관리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4월과 5월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 명의 망자도 찾아오지 않은 텅 빈 플랫폼을 낯설게 바라봤다. 마침내 이유를 알아낸 관리자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망설였네요. 모두가.”
4월과 5월이 동시에 물었다.
“망설였다고?”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를 받은 자가 망설였고, 명령을 받은 자가 망설였고, 문서를 읽은 자가 망설였고, 전투복을 입은 자가 망설였고, 탄약고에서 실탄을 내어주는 자도 그 실탄을 받은 자도 망설였어요. 헬기에 타는 자도, 헬기를 조종하던 자도, 장갑차 운전병도, 모두 망설였어요. 모두 이게 맞는 걸까. 옳은 걸까.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늦추고 몸에 힘을 뺐네요. 문을 닫아야 할 자가 문을 열었고, 문을 열어야 할 자는 문을 닫았어요. 벽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벽을 부순 사람도, 그 벽을 넘는 사람도 있었네요. 군인 앞에 선 시민들도 욕하고 분노를 퍼붓는 대신 차분하게 군인을 설득했어요. 군인들도 시민들의 말을 막지 않고 귀 기울여 들었고요. 이러면 안 된다,라는 말에 흔들리고 흔들렸어요. 망설임과 망설임이 맞바람처럼 커져 날아가는 화살을 땅에 떨어뜨렸어요. 세상에, 놀랍네요. 총이 있는데 발사되지 않다니. 몽둥이를 쥐었는데 아무도 휘두르지 않았다니.”
4월이 말했다.
“그러니까… 아무도 안 죽었다고?”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5월은 관리자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살펴본 뒤 하아, 소리를 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적이네. 기적이야.”
관리자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네요.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네요.”
4월과 5월은 지친 몸을 서로 부축하며 저승으로 향했다. 밤새 노심초사하고 염려한 탓에 평소보다 더 투명하고 작아진 것 같았지만 어째서인지 더 가볍고 좋아 보였다.
“먼 길 조심히 돌아가세요.”
관리자는 유령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유령들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며 바람에 날린 꽃씨처럼 저 멀리 사라졌다. 관리자는 의자에 주저앉아 지친 눈으로 플랫폼을 둘러봤다. 긴장으로 어깨가 굳고 눈이 뻐근했다. 어찌 보면 밤새 기다렸다가 결국 허탕을 친 셈인데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4월 유령은 4·3, 4·19 5월 유령은 5·18의 넋… 망설임, 기적 만들었다
■ 작가의 말
한국사회를 뒤흔든 ‘계엄’이라는 소재로 글을 쓰게 된 정용준 작가는 세상의 혼란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유령들을 작품에 등장시킨다. 정 작가는 “작품을 읽다 보면 유령이 어떤 시기, 어떤 사건과 관련해 숨진 영혼들을 지칭하는 것인지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4월의 유령은 1948년 제주 4·3사건이나 1960년 4·19 혁명, 5월의 유령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의 넋으로도 읽힌다. 다만 정 작가는 유령이 생긴 원인을 하나의 사건과 결부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며 여러 비극을 대입해도 된다고 설명했다.
4월·5월 유령의 걱정과 달리, 2024년 계엄 사태 이후 12월의 유령이 생기지 않은 것은 개개인의 마음에서 피어난 ‘망설임’ 덕분이다. 불합리한 명령이 내려졌고, 군인들은 출동했으며, 시민들과 대치했지만 모두가 망설였기 때문에 피 흘리는 사람 없이 사태는 막을 내렸다. 정 작가는 “한 명의 혁명가가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 한 줌의 망설임이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라며 “역사는 반복된다고 생각해 왔는데, 망설임이 역사의 방향을 바꿨다는 점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그에게 망설임이란,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하기 시작한 것’의 또 다른 표현이다. 정 작가는 200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고 대표작으로는 ‘가나’ ‘바벨’ ‘프롬 토니오’ 등이 있다. 황순원문학상, 문지문학상 등을 받았고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인지현 기자